유교책판이야기

2편-퇴계문집책판 제작 30년 사연

82호서비 2016. 6. 20. 13:32


[DLP]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교책판 이야기입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교책판
가운데 올 2월 보물 1895호로 지정된 경자본
'퇴계선생 문집책판과 문집'은
퇴계사후 30년의 산고끝에 완성됐습니다.

 30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퇴계선생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향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데요.

퇴계선생 문집책판의 탄생 비화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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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0년 12월 퇴계선생이 서거하자마자
지역 사회에서 선생의 학덕과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공론이 시작됐고 곧바로
그 다음 해 3월 퇴계선생 문집 출간작업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역동서원에서 시작된 편찬작업은
무려 9년뒤인 1579년에 1차 결실을 맺게 됩니다.

(C/G) 선조로부터 국가공인출판인
교서관 인출을 명령받은 제자들은
1580년부터 월천 조목 등을 중심으로
초고본에 대한 본격적인 편집작업을
시작해 1586년 51책의 중초본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등
다른 제자들이 이견을 내면서 재교정작업에
들어갔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애, 학봉의 참전과 지역 제자들의 의병활동으로 교정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의 이견은 퇴계선생의 이상향을
어떻게 구현하는냐는 차이에서 비롯됐습니다.

◀INT▶김형수 박사/한국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
"서애 선생은 군주를 성인으로 만들어서
성인 정치를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월천 선생은
향촌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모두가 군자되기라고
하는 그런 이상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었습니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인 넓이에 대해서 서로
제자들 간의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30년이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퇴계문집 경자본은
전쟁중반에 다시 월천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이
초기 중초본을 기반으로 재교정하면서
1600년 경자년에 판각까지 완성했습니다.

 퇴계사후 30년이나 걸려 완성된 퇴계문집은
이후 조선중후기 문집편찬의 원형이 되고
조선기록문화의 중흥을 알리게 됩니다.

◀INT▶김형수 박사/한국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
"퇴계집은 앞에 시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치가로 참여했던 상소, 교서를 배치하고 다음에
문인들과 제자들,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배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사상적인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퇴계 문집이 그 전형이 됩니다."

 제자들과 함께 집안의 모든 원고를 추리고
편지글 등 다른 사람에게 써 준 기록들을
모으고 편집과정에도 참여했던 손자 이안도
선생은 문집완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INT▶이상호 박사/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가족이었던 몽재 이안도 선생은 할아버지의
선양을 위해서 계속 문집 발간 사업에 치중하게 되는데요.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실제로 그의
서찰을 모으고 집에 있는 문집을 챙기고하는
이런 작업들을 이안도 선생께서 거의 주도를 하게 됩니다. 10년 가까이 그런 작업들을 하시다가 결국 1584년 문집의 발간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안타까운 기록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퇴계와 고봉 기대승선생의 유명한
사단칠정 사상논쟁도 편짓글을 통해 이뤄집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어떻게 편지를 보내고
받았는지 등 퇴계와 고봉의 편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유교책판이야기 이호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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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jKOcqpznZ4